피에 물든 소매
                                 - 류시화

소매 속에 나는
구름을 넣어 갖고 다녔다
아무도 그 구름을
구름이라고 하지 않았다

소매 속에 나는
나의 심장을 넣어 갖고 다녔다
누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든
내 소매는 심장이 내뿜는 피에 물들고
사람들은 그것을
피에 물든 소매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주 새로운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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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
                                      - 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 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무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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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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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물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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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 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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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써라
                             - 류시화


어떤 러시아 시인은 말했다
피로 써라
시를
시 같은 유서를
다만 피로 써라

나는 피로서 시를 쓰지 않는다
시가 거의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때로는 언어 이외의 것으로 울고 싶어지는
아, 이 무슨 삶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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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 못을 박다
                                   - 류시화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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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 류시화

Diary/Poem 2006/10/07 07:00

나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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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평론한다는 사람들에게
                                                        - 류시화


안녕! 내 혼의 무게로 쓰여진 이 시들을 이해하려면
너 또한 네 혼의 무게로 잠 못 이루어야지
어디, 나와 함께
이 낯선 저녁 안개 속을 지나갈까?
손잡고서
그러나 조심하거라
저 나무가지 위에 무서운 검은새가 있어
너의 눈을 공격할까
두려우니
이곳은 시인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벌레들이 내 시집의 귀퉁이를 갉아먹고
나는 너의 두꺼운 안경이 무서워
아, 무서워
신발을 내던지고 모래 언덕 너머로 달아나는데
너는 어느 별에서 왔길래 그토록
어려운 단어들을 가봉속에 넣고 있니?
머리가 아프겠구나
머리를 식힐겸
우리 그별의 이야기를 동무삼아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를 때까지
이 저녁 안개 속을
한번 해쳐가 볼까?
죽음 너머의 세계를 너는 보았니?
아니다, 너에게는 너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겠지
너 또한 시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있겠지
버림받은 어린시절, 그 상처 같은 것
슬픔 또는 허무 같은 것
안녕! 잘 자라,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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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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