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1 - 정지용

Diary/Poem 2007/05/29 05:43

호수 1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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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안도현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 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내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라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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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물든 소매
                                 - 류시화

소매 속에 나는
구름을 넣어 갖고 다녔다
아무도 그 구름을
구름이라고 하지 않았다

소매 속에 나는
나의 심장을 넣어 갖고 다녔다
누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든
내 소매는 심장이 내뿜는 피에 물들고
사람들은 그것을
피에 물든 소매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주 새로운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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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
                                      - 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 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무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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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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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물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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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지우개
                                         - 안도현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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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 조병화

Diary/Poem 2006/10/07 07:02

초상
                                                        - 조병화


내가 맨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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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 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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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써라
                             - 류시화


어떤 러시아 시인은 말했다
피로 써라
시를
시 같은 유서를
다만 피로 써라

나는 피로서 시를 쓰지 않는다
시가 거의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때로는 언어 이외의 것으로 울고 싶어지는
아, 이 무슨 삶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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